페니실린 생산시설 착공…국내 항생제 공급망 정비 속도

보령, 안산 캠퍼스서 페니실린 생산시설 증설 착공. [사진=보령]
보령, 안산 캠퍼스서 페니실린 생산시설 증설 착공. [사진=보령]

국내 제약사가 오랜 시간 비워둔 항생제 생산 공백을 채우기 위한 움직임을 다시 시작했다. 보령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보령 안산 캠퍼스'에서 페니실린 생산시설 증설을 위한 착공식을 진행하면서 국내 항생제 생산 체계 복원에 속도가 붙고 있는 것.

팬데믹 이후 항생제 품귀 현상이 반복되고, 중국·인도 의존도가 90%를 넘는 공급 구조가 이어지면서 항생제 주권 확보는 제약업계뿐 아니라 국가 보건안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과제가 됐다.

국내 시장은 지난 10여 년 동안 값싼 수입 제품에 밀려 항생제 원료 생산 기반이 빠르게 약화했다. 수익성이 떨어지고 제조원가가 높아지는 환경에서 기업들은 생산시설을 유지하지 못했고, 결국 상당수 제약사가 이 분야에서 철수했다. 

팬데믹 이전까지는 업계에서도 항생제 생산이 중국과 인도로 넘어가는 흐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코로나19로 해외 공장 가동이 멈추면서 세계는 항생제 공급이 얼마나 취약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때부터 각국 정부는 항생제를 단순한 저가 의약품이 아니라 '국가 안보 물자'로 보기 시작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2022~2023년 겨울, 감기 환자 증가와 중국의 생산 지연이 맞물리면서 여러 감염질환 치료제가 광범위하게 품귀현상을 빚었다. 약국과 의료진은 대체재를 찾기 위해 큰 혼란을 겪었고, 환자들은 진료를 받고도 약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항생제가 단순한 저가 의약품이 아니라 감염치료의 마지막 안전망이라는 사실을 사회가 다시 확인한 것이다.

보령의 이번 투자는 이처럼 변화한 환경 속에서 나온 결정이다. 회사는 페니실린 계열 항생제를 자체적으로 생산해 국내 공급 기반을 확실히 다지고, 향후 수출까지 고려한 경쟁력 있는 생산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목표를 밝혔다. 

단순히 공장을 신축하는 것이 아니라, 항생제 생산 전 과정에서 요구되는 고순도 공정과 품질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설비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항생제 원료와 완제의약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제조 기술뿐 아니라 품질관리, 감염관리 지식 등 산업 전반의 역량이 필요하다.

정부도 필수의약품 안정공급 체계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식품의약품안전처와 보건복지부는 최근 몇 년간 ‘국가필수의약품’ 지정 항목을 관리하고, 공급 차질이 잦은 의약품에 대해 수급 안정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원료의약품 국산화 전략도 이 과정에서 핵심 축을 이룬다. 항생제는 대표적인 필수의약품이자 국가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부족해지는 품목이기 때문에, 정부 정책 방향이 기업의 투자 결정을 뒷받침하는 구조가 형성 중이다.

보령 본사 전경. [사진=보령]
보령 본사 전경. [사진=보령]

국제적으로도 항생제 생산의 전략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항생제를 포함한 필수의약품 목록을 다시 정비하며,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는 세계 항생제 시장의 '생산 허브'로 자리 잡았지만, 팬데믹 동안 보여준 공급 변동성은 각국 정부가 새로운 대안을 찾게 만든 계기가 됐다. 글로벌 제약사들도 기존의 '저단가 생산 중심 전략'을 수정하고, 공급안정성과 품질 중심의 포트폴리오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보령의 페니실린 생산시설 착공은 한국이 이 흐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가다. 기존에는 국내 기업이 항생제 분야에서 가격 경쟁력으로 중국·인도와 정면 경쟁하기 어려웠지만, 세계 시장의 규칙이 바뀌고 있다. 

안정적 공급망을 갖춘 국가·기업이 오히려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구조로 변화하는 가운데, 한국의 기술력과 품질 기준은 충분히 시장성을 갖는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보령이 축적해 온 항암제·만성질환 영역의 제조·품질 역량이 항생제로 확장할 경우, 회사의 장기 포트폴리오 다변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보령이 신규 설비를 가동하면 국내 병·의원과 약국의 항생제 공급 안정성에도 일정 부분 기여할 전망이다. 국내 생산량이 확대되면 해외 수입 의존도가 다소 완화되고, 품질 기준을 충족한 제품을 확보하면서 수급 변동성을 줄일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안정적 생산능력을 갖춘 국가와 기업 수요가 증가하는 만큼, 보령의 생산체계가 어느 수준까지 경쟁력을 확보할지도 관심사다.

보령 관계자는 "이미 국내 수탁 물량의 약 60%를 맡고 있지만,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릴 경우 항생제 부족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며 "이번 투자는 이런 유사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안정적 생산체계 구축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단기 수익보다 필수의약품 공급 안정에 목적이 크고, 원료 생산이 늘면 중장기적으로 원가 경쟁력도 개선될 것"이라며 "시장 규모가 크게 변하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여러 업체가 조용히 철수한 상황에서 국내 제조 기반을 유지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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