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진(약사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회장)
박현진(약사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회장)

얼마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는 한 등장인물이 약에 취한듯 정신을 못차리자 다른 인물이 질문을 던진다. "본드야 판콜이야?" 또한 2023년에는 직구로 구입한 감기약을 대량 복용한 중학생이 환각에 빠져서 길에서 발견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편의성이란 명분하에 의약품 접근성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일반의약품(OTC; Over-the-Counter) 진통제는 편의점에서 구입을 하거나, 직구의 허점을 이용해서 온라인 등을 통해 손쉽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소위 창고형 약국이라는 형태로 소비자의 선택권을 극대화 시킨 약국도 출현하였다. 이는 국민들의 약물 이용 행태에도 큰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셀프메디케이션(self-medication)의 활성화라는 긍정적 효과와 함께 약물 오남용이라는 잠재적 부작용도 동반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OTC 진통제의 무분별한 접근성이 단기적으로는 국민 편의를 증진시킬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마약성 진통제(오피오이드) 소비 증가라는 심각한 공중보건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관찰되고 있는 사실이며,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서 검증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들 국가는 OTC 진통제 접근성이 매우 높은 동시에, 오피오이드 소비량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국의 경우 편의점, 마트, 온라인을 통해 이부프로펜, 나프록센 등 다양한 진통제를 구매할 수 있으며, 약사의 개입 없이 구매가 가능하다.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 미국의 오피오이드 소비량은 다른 국가 대비 수배에 이를 정도로 높게 유지되고 있으며, 이는 중독과 오용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배경이 된다.

반대로 프랑스나 오스트리아는 OTC 진통제를 약국 내에서만 판매하며, 약사의 복약지도가 필수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들 국가는 OTC 접근성 점수가 낮고, 동시에 오피오이드 소비량도 낮게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일반의약품의 제도적 접근성과 마약성 진통제의 사용량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해야 할 개념은 '게이트웨이 효과(gateway effect)'다. 이는 초기의 낮은 강도의 약물 사용이 반복되며 내성 증가와 통증 민감도 변화 등을 통해 점점 더 강력한 약물로의 이행 가능성을 높이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로 미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Agley et al., 2015)에서는 OTC 진통제를 반복 남용한 경험이 향후 오피오이드나 불법 약물 남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한국도 이러한 현상의 예외는 아니다. 2012년 도입된 '안전상비의약품 제도'는 아세트아미노펜, 이부프로펜 등 13개 품목을 편의점에서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는 소비자의 접근성을 높였지만, 동시에 부작용 신고 건수 급증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실제로 2012년 대비 2013년에는 아세트아미노펜 부작용 보고가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마약성 진통제의 사용이 실제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의 오피오이드 처방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인구 1000명당 연간 처방 건수는 347.5건에서 531.3건으로 증가했으며, 특히 강력 오피오이드 처방은 같은 기간 0.6건에서 15.2건으로 급증하였다. 2009~2013년 사이에는 연평균 116%에 달하는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으며, 이후에도 연평균 12.8%씩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국제적 추세와는 상반된다. 미국, 캐나다, 독일 등 고소득 국가들은 2015년 이후 오피오이드 처방량을 평균 23.8%가량 감소시켰다. 세계보건기구(WHO)와 Global Burden of Disease 연구에 따르면, 선진국들은 오피오이드 관련 질병 부담을 낮추기 위해 규제를 강화해왔으며, 그 효과가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은 WHO 분류상 고소득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오피오이드 소비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시장 흐름으로 보기 어려우며, OTC 진통제의 무분별한 규제 완화가 배경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약사 개입이 없는 OTC 유통이 증가하면서 소비자들이 약물 사용에 대한 충분한 정보 없이 진통제를 반복 복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통증 민감도와 내성 문제가 심화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NSAIDs(비스테로이드 항염증제)의 반복 사용이 오피오이드 진통제에 대한 교차내성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Tsagareli et al., 2011)가 이러한 가설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OTC 진통제 남용이 오피오이드 사용으로의 이행에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정책 결정자는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결국 의약품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다. 의약품은 인체에 직접 작용하며, 그 안전성과 효과에 대해 사회 전체가 엄격히 책임져야 하는 공공재적 성격을 가진다. 특히 진통제와 같이 중독성과 내성이 강한 약물에 대해서는 편의성보다 안전성과 통제 가능성을 우선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편의점협회와 유통업계를 중심으로 안전상비의약품 품목 확대를 요구한다거나, 특정 소비자들은 창고형 약국과 같은 OTC 유통 채널 다변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의약품을 일반 소비재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한다. 약은 물건이 아니며, 생명을 다루는 수단이다. 따라서 일반 상품처럼 '편리함'만을 기준으로 접근성을 논의해서는 안 된다.

정책 당국은 OTC 진통제의 제도적 접근성 확대가 가져올 수 있는 중장기적 위험성을 철저히 분석하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규제 설계를 시도해야 한다. 규제 완화 이전에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선행 조치들이다. 약사의 복약지도 강화를 위한 법적 근거 마련, 청소년과 취약계층 대상 약물 안전 교육 확대, 약물 남용 모니터링 체계 강화, 그리고 안전상비의약품에 대한 적절한 재평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진통제의 접근성은 단지 편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마약성 진통제의 소비 증가, 더 나아가 사회적 중독 문제와 직결된 이슈이다. 의약품 정책은 단기적 편의성에 치우치지 않고, 공중보건의 원칙에 충실한 방향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충분한 검증 및 고려 없는 규제완화는 결국 국민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칼날로 돌아올 수 있다.

*본 칼럼 내용은 칼럼니스트 개인 의견으로 매경헬스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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