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발전으로 출혈량을 최소화하는 무수혈 수술이 확산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의학의 발전으로 출혈량을 최소화하는 무수혈 수술이 확산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의학과 의료기술 발전으로 '수술=수혈'이란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 수술 전 조혈제, 고용량 철분제 등으로 혈액의 양과 질을 끌어 올리고, 셀 세이버와 같은 자가수혈장치, 복강경과 로봇을 필두로 한 첨단 수술 장비를 활용해 출혈량을 최소화하는 '무수혈 수술(최소 수혈)'이 현실로 구현되고 있다. 

무수혈 수술이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수혈을 받지 않아 위험해질 확률보다, 수혈을 받아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더 크기 때문이다.

박종훈 고려대안암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과거에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수혈을 거부했지만 지금은 의료진이 환자 안전을 위해 수혈을 덜 할 방법을 고민한다"며 "수혈이 생명을 살린다(Blood save lives)는 의료계의 믿음은 이제 ‘수혈을 줄여야 생명을 살릴 수 있다’(Save blood, Save lives, 2015년 Nature지 논문 제목이기도 함)로 드라마틱하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 면역거부반응, 감염 등 완벽한 예방 어려워

우리 몸에서 혈액이 하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산소 공급이다. 심장, 뇌 등 몸 곳곳에 산소를 품은 적혈구를 보내야 장기가 ‘숨 막혀 죽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혈관의 부피 유지다. 혈액이 혈관을 가득 채워야 영양공급과 대사물질 제거가 원활히 이뤄진다. 

수혈은 부족한 피를 공급하는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런데도 의료계에서 최소 수혈을 위해 노력하는 건 '동전의 양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 면역거부반응이다. 인체 면역세포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질을 '적'으로 간주해 공격하는데, 다른 사람의 혈액도 이식한 장기처럼 '공격 대상'에 속한다. 수혈을 받은 뒤 흔히 나타나는 발열, 두드러기 등의 부작용도 면역거부반응의 일종이다. 심한 경우 급성 폐손상이 발생해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국제학술지 란셋(Lancet)에 실린 2011년 논문을 보면 22만여명의 수술 환자를 빅데이터 분석한 결과 수혈 환자의 사망률은 100%, 합병증 위험은 80%가 증가해 오히려 빈혈을 그대로 두고 수술할 때(각각 40%, 30%)보다 위험했다.

박종훈 교수는 "종전에는 환자의 감염이나 사망률 증가가 수술 때문인지 수혈 때문인지 몰랐지만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개별적인 원인 파악이 가능해졌다"며 "수술의 난이도, 시간, 출혈량 등을 보정한 결과 수혈이 되레 환자 안전을 위협한다는 점은 광범위하게 입증됐다"고 말했다.

2015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논문 '수혈을 줄여야 생명을 살릴 수 있다’(Save blood, Save lives). [Anthes E. Save Blood, Save Lives.  NATURE – vol 520 – 2 April 2015]
2015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논문 '수혈을 줄여야 생명을 살릴 수 있다’(Save blood, Save lives). [Anthes E. Save Blood, Save Lives.  NATURE – vol 520 – 2 April 2015]

둘째, 감염 위험이다. 검사, 멸균 기술의 발달로 위험이 크게 줄었지만 수혈로 에이즈나 B·C형 간염에 걸릴 위험을 완벽히 차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감염병의 출현도 환자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다.

다른 혈액형을 수혈받는 사고도 드물지만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모 의료기관에서 O형 간암 환자에게 의료진이 혈액전용 냉장고의 같은 칸에 보관된 다른 환자(B형) 혈액을 수혈하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즉각 수혈을 중단했지만 자칫 면역거부반응으로 신부전, 쇼크 등 심각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었다.

셋째, 혈액 공급량 부족이다.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으로 혈액 수급은 난항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 불필요하게 수혈을 남발하다간 정작 필요한 환자에게 충분한 수혈이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혈액은 보관 기간이 길어질수록 형태가 달라지고 뭉쳐 무작정 쌓아둘 수가 없다. 노재휘 순천향대서울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헌혈량이 전반적으로 줄면서 피를 구하지 못해 수술이 지연되거나 취소되는 사례가 더 늘었다"고 말했다.

◆ 환자 안전 위해…政, 수혈 적정성 평가 도입

무수혈 수술은 세계적인 트렌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2010년 63차 정례회의에서 “환자에게 최소한의 수혈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권고문을 발표했다. 우리나라도 2009년 제정한 수혈 가이드라인을 매번 개정하는데, 불필요한 수혈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의 '적정 수혈'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다.

수혈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건강한 일반 성인은 적혈구 내 헤모글로빈(혈색소) 수치가 7g/dL 미만이거나 몸 밖으로 빠진 피가 전체의 30% 이상(보통 1.5L)일 때를 제외하면 대게 수혈이 필요하지 않다. 

수혈(1차) 적정성 평가 결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수혈(1차) 적정성 평가 결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물론 환자의 나이, 기저질환, 혈색소 수치, 적혈구 용적율, 심박출량과 같은 심혈관계 상태에 따라 동일한 수술이라도 수혈이 요구되는 상황도 있다. 과다 출혈이나 암, 심장, 뇌, 중증 폐 질환과 같은 큰 외과 수술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건강한 성인은 대부분 외과 수술에서 수혈을 받지 않아도 된다. 박종훈 교수는 “출혈량과 사망 위험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며 “혈액이 일부 빠져나가도 체액이 혈관으로 넘어가 부피를 유지하고, 적혈구의 산소 운반 능력이 강화되거나 혈액 순환이 빨라지는 등의 변화로 장기〮기관은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무수혈 수술이 효과적이라는 다양한 증거와 논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수혈이 많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난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국내 515곳의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적정 수혈이 이뤄지는지 평가했더니 무릎 인공관절 수술 중 수혈을 한 비율이 41%에 달했다. 미국(8%), 영국(7.5%), 호주(14%)와 비교해 눈에 띄게 높은 수치다.

노재휘 교수는 “저출산, 고령화로 혈액 부족 문제는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이라며 “의료진과 환자 모두 수혈을 줄이는 데 관심을 갖고, 정부도 적정성 평가 등 이를 독려하기 위한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경헬스에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억울한 혹은 따뜻한 사연을 24시간 기다립니다.
이메일 jebo@mkhealth.co.kr 대표전화 02-2000-5802 홈페이지 기사제보

관련기사

저작권자 © 매경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