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건강이 국가 경쟁력] ⑥해외 사례로 본 '건강한 일터'의 조건
'런베뮤' 과로사 의혹, 장시간 노동 문화가 남긴 비극 OECD 국가 중 노동 시간 길지만 만족도·생산성 낮아 네덜란드·독일·미국, '건강한 일터 만들기' 참고해야
대한민국의 고도성장 이면에는 수많은 근로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철야 근무로 인한 과중한 업무, 빈번한 산업재해, 그리고 직장 내 괴롭힘 둥이 여전히 근로자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실제로 매년 수백 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우울증·불안장애·자살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근로 환경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근로자 건강이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인 시대'다. 매경헬스는 근로자들의 건강 관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해외 우수 사례들을 통해 국내 기업들의 근로자 건강관리와 복지 실태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개선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지난 7월 '런던베이글뮤지엄(런베뮤)'에서 일하던 20대 직원이 사망한 사실이 최근 뒤늦게 알려졌다. 사망한 직원은 일주일 동안 총 80시간 12분 일한 것으로 드러나 과로사 의혹이 제기됐다. 이후 런베뮤에 대한 퇴직금 체불 신고, 과중한 업무 지시 등 제보도 잇따랐다. 이는 '장시간 노동 문화가 남긴 비극'이라고 평가되며 건강한 일터 만들기에 대한 요구에 다시금 불이 붙은 상황이다.
◆ 일터의 건강은 국가 경쟁력의 기반
실제로 우리나라 일터 곳곳에선 건강하게 일할 권리가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다. 지나친 근로 시간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연간 2000시간을 일터에서 보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결과 우리나라 근로자의 연간 노동시간은 1874시간이다. 하루의 7~8시간, 30% 가량을 일에 쓰는 셈이다. 한국인의 평균 수면 시간(6~7)시간보다 많다.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까지 하면 대부분이 시간을 일에 쓴다. OECD 평균(1740)과 비교해도 131시간이나 길다.
그러나 근로 시간과 삶의 만족도는 반대다. OECD의 '삶의 질 지표'에서 한국은 '일과 삶의 균형' 항목이 38개국 중 35위에 그쳤다. 장시간 노동은 단순한 피로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주 60세 이상 지나치게 노동한 사람은 일반 근로자 대비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이 약 1.48배, 정신질환 발생 위험이 약 1.29배 높았다. 또 55시간 이상 근무 시 허혈성 심장질환은 17%, 뇌졸중은 35% 증가했다는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의 연구도 있다.
OECD 국가 중 노동 시간은 길지만 시간당 생산성은 51.5달러로 전체의 24위, 하위권이다. 전문가들은 일터의 건강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기반이라고 강조한다. 직원이 건강해야 생산성이 유지되고, 장기적으로 의료비·복지비 부담이 줄어든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17년 발간한 '근로시간 단축이 노동생산성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는 주40 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 10인 이상 제조업 사업체의 노동생산성을 조사했더니 1인당 연간 실질 부가가치 산출이 약 1.5% 향상됐다고 보고한다.
또 미국 보스턴칼리지 줄리엣 쇼어 교수와 연구팀은 2022년부터 주 4일 근무제에 대한 연구를 전 세계 245개 조직과 8700명 직원을 상대로 진행했더니 직원들의 69%가 번아웃 감소를 경험했고, 42%는 정신 건강이 향상됐으며 37%는 신체 건강이 개선됐다. 해당 연구 결과를 담은 쇼어 교수의 저서 'Four Days a Week(주 4일 근무)'에서 그는 "주 4일제로 근무 시간을 20% 줄여도 성과를 100%로 유지할 수 있다"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가장 흔한 방법은 회의 시간을 줄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건강한 일터 만드는 해외 모범 사례
해외 많은 국가는 '건강한 일터 만들기'를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국가는 네덜란드다. 주당 근무시간은 약 27.7시간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짧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유럽연합(EU) 국가 중 5개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OECD가 평가한 일·가정 양립 영역 부문 전체 41개국 가운데 5위다. 해당 평가에서 10점 만점에 8.3점을 받았다.
이 배경에는 2000년대 초부터 정착된 유연근무제와 파트타임 제도가 있다. 정부는 파트타임 근로자에게도 정규직과 동일한 사회보장 혜택을 제공하고, 기업은 근로자의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했다. 여기 더해 지난 2022년 코로나19 펜데믹 시기에는 재택근무를 근로자의 권리로 인정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원격근무를 도입한 고용주에 사회보장기여금을 감면하고, 고용주가 지불한 원격근로자의 인터넷·전화비용 등에 세제 혜택을 지원토록 했다.
독일도 모범 사례로 꼽힌다. 독일은 공공·민간 부문이 함께 추진하는 통합 건강관리 정책 '기업 건강경영제도(BGM)'가 있다. 공공 기업이 직원의 스트레스, 식습관, 근무환경, 심리적 안정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면 세제 혜택과 정부 지원을 받는다. 자유기업원 조사 의하면 2023년 기준 독일의 시간 당 노동 생산성은 93.7달러로 한국(54.6달러)보다 높다.
독일은 또 근로시간법을 통해 하루 근로 후 최소 11시간 연속 휴식을 보장하고 하루 8시간·주 48시간 근무 한도를 원칙으로 한다. 일요일·공휴일 근무는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예외 시 반드시 대체휴일을 제공해야 한다. 야간·교대근무자는 건강검진 등 추가 보호조치를 받는다.
미국의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일찌감치 근로자 복지를 투자로 인식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세일즈포스 등은 사내 헬스케어센터, 요가 프로그램, 무료 식사, 유연 근무제 등 다양한 복지 시스템을 갖췄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원격근무가 확산되면서, 미국 기업들은 ‘성과 중심 유연 근무제’로 전환하여 업무 효율성과 근로자 만족도를 동시에 높였다.
미국에서도 국가적 차원이 노력이 계속된다. 미 연방정부는 근로시간만이 아닌 작업환경·안전·건강을 담당하는 기관인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SHA)을 통해 산업안전·보건 기준을 설정하고 집행하고 있다. OSHA는 또 "직무 스트레스는 산업재해의 한 형태"로 규정하고, 관리자 교육, 피드백 시스템, 유연근무제 도입을 기업에 권장한다.
국내에서도 최근 몇년 새 제도적 움직임은 확대되고 있다. 현 정부는 '노동시간의 질적 전환과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주 4.5일 근무제 도입을 추진하는 중이다. 줄어든 노동 시간만큼 삶의 질이 개선되고 이로 인해 생산성도 높아질 것이란 기대다. 근로자가 일과 여가를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도록 제도적·환경적 여건을 조성한 우수 기업과 기관에 인증을 부여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여가친화기업 인증제'도 우수 사례로 평가된다.